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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거대 담론은 있는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보고...

물에 불린 바나나 2009. 3. 5. 16:29

더 이상 거대 담론은 있는가?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보고...


흔히 이 시대를 일컬어 포스트 모던 시대라 명명해왔다. 포스트 모던은 말그대로 모던 이후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다고 보아야겠다.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아우르는 시대 사조라는 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여러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거대담론의 부재다.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포착한 듯 보인다. 세 남자-보영, 아휘, 장-는 더이상 인간을 지배하는 절대 이념에 각각의 개인을 대비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며 그들의 고민의 신과의 교감도 사회에서의 위치 선점도 아니며 다만 자신들의 고독을 나눠 가질 누군가를 찾아 헤매인다.

 

이구아수 폭포를 찾아가는 이국의 두 청년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결국 서로가 서로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 청년 장이 가세하여 그들의 징검다리가 아닌 제3의 ‘나’가 된다. 이제 세계의 중심은 개별화된 ‘나’이며, 그 속에서 ‘우리’라는  두는 차가운 폭포수와 광활한 바다에서 다만 그리움으로만 존재한다.

 

감독 왕가위는 여전히 분절의 미학을 보여주는데 보다 정교한 쇼트의 분할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 기호, 즉 시간의 지배하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실험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를 ‘퀴어 시네마’라는 규정된 테두리 안에 놓아서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홍콩인이 95년도에서 97년 사이에 먼 이국땅 아르헨티나에서 느끼는 감정은 사랑을 넘어서고 있으며 결국 이것이 이 영화를 구차한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게 하는 요인이다.

 

왕가위라는 이름에 주눅들어하는 관객들이 있다면 아무 선입견 없이 편안한 맘으로 보기를 권한다. 이 영화는 그만큼의 허점-더 이상 발전이 보이지 않는 식상한 스타일, 인물 묘사의 부족-도 많다.

 

영화의 끝 무렵 세 남자의 세 장소-보영의 아르헨티나, 아휘의 대만, 장의 우슈아야 폭포-는 해피 투게더의 출발점으로서 다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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