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세상

[스크랩] 길 위에서-4

물에 불린 바나나 2009. 2. 8. 17:41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 새로운 길>

 

 

 

일자 : 2006년 4월 29일(토)/30일(일)

코스 : 운산면- 해미면-고북면-갈산면-서부면-결성면-광천읍/50km

 

 

K에게.

 

알람소리에 꿈인 듯 일어나 먼저 창문을 열고 밖의 날씨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미 한차례 비가 지나간 흔적만 있을 뿐 다행이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파트의 시멘트 주차장을 촉촉히 적신 모습이 오히려 도보에 나서는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배낭을 꾸려 봅니다. 배낭커버와 비옷, 그리고 랜턴과 비상용 약품이 든 주머니가 항상 제일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지금까지의 도보와 등산에서 이 주머니를 열어볼 기회는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기를 바라지만, 이 주머니는 제가 챙기는 모든 짐의 으뜸이 되고 있습니다. 다음은 여분옷으로 속옷과 상의, 그리고 수건 각각 한 장과 양말 한 켤레를 챙겨 넣습니다. 세면과 화장용품이 든 세면용품 가방을 챙기고 카메라를 넣고, 마지막으로 물통을 챙겨 옆주머니에 넣습니다. 이 정도면 이틀간의 도보를 위한 준비로서는 훌륭한다는 생각이 스스로도 듭니다.

 

아쉬운 점이 한가지있다면, 지도를 가지고 다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도보를 시작하면서 구입한 1/50,000 도로지도책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배낭에 넣고 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서기 전에 미리 예상하는 도보코스를 별도의 노트에 적어서 가지고 다닙니다. 이 노트와 다른 한 권의 책이 저와 함께 도보에 나서는 동료가 되는 셈입니다. 이제 배낭은 5kg이 조금 넘는 무게로 제 등에 업혀 일정을 함께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게 현관문을 조용히 닫고 나서면 되는 것입니다.

 

이번 도보는 서산 운산면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예정은 태안에서 서산까지 걸어 천안에서 태안, 그리고 안면도를 연결하는 나름의 궤적을 남기고 싶었지만 태안과 서산간 도보에 적당한 도로를 찾을 수가 없어 궤적의 연결은 포기하고, 이제부터의 도보는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운산과 해미간 647번 지방도로의 양쪽 옆으로는 한우종자개량조합에서 조성한 방목용 목초지가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물이 올라 나약한 듯 싱그러운 풀들로 가득한 목초지 풍경을 걷고 있으려니 '4월은 잔인한 달'이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광폭한 전쟁이었던 2차 세계대전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진 폐허 위에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야 했던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일견 무심해 보이는 봄 4월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잔인했던 4월이 다 가고 있었습니다.

 

해미면의 들머리에는 향교가 있었습니다.

 

 

향교로 올라가는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으라는 뜻이지만 이 어찌 말에서만 내리란 의미겠습니까? 자신을 추스리고 마음을 겸손히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점심식사를 마치고 해미읍성을 둘려 보았습니다.

 

 

해미읍성 내부에는 동헌과 객사, 민가 몇 가구 그리고 옛 옥사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조선 말엽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해미읍성에서 고문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고 서문 밖에서 처참하게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유물발굴작업과 함께 성지화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여서 어수선한 분위기 였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 도착한 고북면에는 저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의용소방대에 설치된 사이렌이었습니다. 고향이 산골이 저도 오랜동안 보지 못했던 정겨운 풍경이 반가웠습니다. 주위를 지나시는 어른신께 여쭈어 보니 지금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일제시대 때는 오종이라 했어. 그 때는 시간알려 준다고 12시에 한번씩 울렸거든."

어릴 적 동네 어른들께서 들려 주시던 똑같은 얘기와 예전 시골 고향에서 의용소방대원이셨던 아버님의 젊은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아버님은 지금의 저보다도 더 젊은시절이었습니다. 잊혀졌던 기억의 파편들이 수십년 시간을 순식간에 넘나들었습니다.

 

갈산면은 오늘 도보 25km의 종점입니다. 커다란 모텔이 보여 고북면에서 들은 바처럼 혹시 찜질방도 있을까 내심 기대는 했지만 예상대로 찜질방은 없었습니다. 애초의 예상대로 홍성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갈산면에서 홍성까지는 대략 12km 거리였지만 4차선 국도를 걷고 싶지도 않았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찜질방은 도보여행자가 하룻밤을 보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낯선 곳의 이방인이 밤에 느끼기 쉬운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소란스러움과 어수선함이 오히려 이방인의 마음에 여유를 주는가 봅니다. 이제는 저도 이런 곳에서 제법 밤잠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가나 봅니다.

 

 

아침을 먹기 위해 나선 길에는 바람이 심했지만 그 끝이 차갑지 않아 다행스러웠습니다. 시내버스로 다시 갈산면으로 되돌아와 서부면으로 향했습니다.

 

 

처음부터 서부면을 경유하여 걸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결성면으로 바로 걸어 광천읍에서 도보일정을 마감할 경우 하루 도보거리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들어 서부면을 경유하는 것으로 일정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서부면에서 길을 엇갈리는 바람에 다시 예정에 없던 몇 km를 더 우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가 이번 도보 중 제일 힘들었습니다.

 

말한 바처럼 지도를 갖고 다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예정일정을 세심하게 챙긴 덕분에 그간의 도보에서 일정에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도보에서 처음으로 길을 엇갈려 예상하지 못한 길로 우회하고 점심식사 시간마져 놓쳤습니다. 시골길에서 면소재지 간은 대략 2-30리 정도의 거리이고 이 사이에서 음식을 먹을만한 식당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서부면에서 결성면까지의 예상거리는 8.5km이고 도착시각은 오후 1시로 예상되어 결성면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미루고 서둘러 출발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무료한 도보 중에는 오토바이 주행을 자주 봅니다.

 

 

천둥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멋진 모습과 기품있어 뵈는 오토바이는 걷는 이가 보기에 무척이나 부러운 모습입니다. 언젠가 한의원에서 엿들은 오토바이 동호회의 사정은 겉보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일견 무절제해 보이는 그들도 뒷자석에 아내외 다른 여자는 태우지 않는다든지 음주 후에는 운전하지 않는 등 엄격한 자체 규율을 준수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으셨답니다.

"젊은 것들이 꼭 아가씨 태우고 기분낸다고 과속하다 사고내지."

 

이제 이 땅 어디에서든 성당이나 교회건물이 낯선 풍경이 아니지만 이 지역에서는 유난히 이런 건물들이 주변풍경보다 두드러져 보입니다.

 

 

아마도 과거 천주교 박해시절 이 지역에서 수많은 순교가 있었던 사연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힘들게 도착한 결성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형장청과 동헌을 둘러 볼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헌 앞에는 커다란 개가 나짓하게 으르릉거리며 버티고 있어 감히 출입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광천읍으로 향하여 오늘의 도보를 끝내려 합니다. 길은 시작처럼 여전히 한갓지고 넉넉합니다. 지나는 이를 위한 집 앞 의자는 마음이 부자인 주인의 소박한 마음입니다.

 

 

어느 길을 걷든지 가장 흔한 풍경은 주인없이 허물어져 가는 집들입니다. 금방까지 누군가가 살았거나 마치 주인이 막 돌아 나올 듯한 집들도 대부분 비어있고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땅을 지키는 분들은 너무 늙고 약해 보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이 땅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이 땅을 지키고 일구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방식의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광천읍 터미널에서 천안행 버스표를 사는데 어떤 분이 소매자락을 잡으며 묻습니다.

"이제는 차타고 어디로 갑니까?"

돌아보니 낯선 남자분인데 사람 좋아보이는 밝고 잘생긴 인상이었습니다.

"저 아세요?"하고 되물었습니다.

시내버스를 운전하시는 분으로 어제부터 제가 걷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본인께서 운행하시는 바닷가까지 같이 놀려가자고 농담까지 하시며 소탈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보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무사히 도보를 마친 안도와 이런 뜻하지 못한 관심으로 마음이 내내 훈훈하였습니다.

 

2006년 4월 30일       당신의 F.

 

추신 : 부탁에도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어차피 마지막 기록이 될 것 같기도 해서 보여드립니다. 이번 경험으로 휴대할만한 지도책을 구할 예정입니다. 아래 사진은 도보예정과 실제과정을 메모한 노트로 이번 도보일정 분입니다. 빨간색은 예정사항이고 검정색은 실제사항을 나타냅니다.

 

출처 : 靑庵靜舍
글쓴이 : 청암정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