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일기.2

[스크랩] 촛불은 불꺼진 거북선 바로 옆, 잠수함 코앞에 있다

물에 불린 바나나 2007. 3. 31. 17:16
글자폰트의 모든 것 예제 촛불은 불꺼진 거북선 바로 옆, 잠수함 코앞에 있다

촛불은 불꺼진 거북선 바로 옆, 잠수함 코앞에 있다.





깊은 밤 노원구에서 길을 잃었다.
한밤중이었다. 새벽 한시가 넘어서 세상에 베여 구멍 난 몸으로
혼자 집을 찾아가는 길은 아프다.
그래서 주춤거리고 비틀거리지만, 이미 활은 시위를 떠났다.

갈수록 미쳐 가는 서울의 소음과 먼지가 깊은 밤에는
좀 덜하다는 것은 유리한 귀향 조건이기는 하나
밤비가 내리는 상황보다는 덜 유쾌하고 즐겁지 못하다.
나란 놈은 한밤중의 눅눅한 습도를 헤치고,
여름 한 낯의 광열(狂熱)을 삼키어
토해내는 복사열이 날뛰는 아스팔트길을 걷는 것은 더 깊은 상처다.

더구나 혼자 걷는다는 것.
그것도 한밤중에 익숙치 않은 잘 모르는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지독히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나침반이나 작은 지도라도 가지고 다니고 싶다.
어둠속에서 난 잠시 방향타를 놓쳤으나
오기가 생기는 것도 이때다.
내가 약해지려는, 타협하려는 순간 난 다시 무작정 앞으로 나간다.

거기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아파트 단지는
참 크고 넓어서 이방인이 길 잃은 미아가 되기가 참 쉬운거 같다.
돌고 돌아 좀 한산한 도로와 아파트 단지를 돌아 다시 노원역이다.
끈적끈적한 셔츠의 단추를 더 풀어보지만
육중한 덤프트럭의 질주후에 후폭풍으로 날아드는 끈적이는
개발의 사정액체가 주는 것은 폐와 간에 들어간 중금속뿐이다.

동부 간선도로 이정표를 보았는데 그리로 갈걸 그랬다.
중랑천을 따라 가면 도봉산 계곡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음주공화국의 도로는 토사물로 넘쳐난다.
수락산역으로 갈까? 그 다음엔 어디로 가지....
연인(戀人)들은 서로의 가죽위에 달린 가슴을 마찰하고.
실연(失戀)인들은 전봇대와 소주병을 부둥켜안고 씨름중이다..

전진(前進)운수라는 택시회사의 담벼락이 보인다.
1호선 전철고가도로 주위다.1호선, 희망이 보인다.
벤치에 누워본다. 시커먼 하늘로 허리가 멍든다.
알량한 자존심은 택시비를 때려뉘여 잠재우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동반자가 없이 걷는다는 것은
혼자 도시를 헤쳐간다는 것은 힘든 아니 아픈 일이다.

방학사거리다! 사거리는 오아시스다.
국군창동병원은 부대 같지 않은 부대다.
병들고 아프고 다친 군발이들이 개구락지들이 있는 곳이 멀뚱하게 도봉구에 있다.
병든 닭 마냥 파리한 얼굴들이 막사 안에 있겠지...
주위엔 접대부들이 있는 술집들이 많이 있다.
병든 군인을 위로하러 와서 술병이 들어가는 것은 민간인 들이다.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오지만 기실 위로 받을 사람들인 것이다.

그래도 술병이 나도 군바리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착한,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통닭과 내의를 사 가지고 오시는 고운 한복의 어머니,
용돈을 쥐어 주시는 다리를 저는 우리의 아버지들.
흰 머리가 난 우리의 부모님세대들은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

약속, 크로바, 사슴, 등대, 그리고 세자매 등등...
지상위에, 고가 철로위에 있는 방학역 중간지점부터 그 아래로
도봉대로를 보고 열려 열려있는 술집들이 보인다..
커다란 잿빛 담을 벽으로 한 술집에서 나온 아줌마 몇이 나와있다.
주름 많큼 많은 사연, 기차길 옆은 그래서 술집도 더 슬프다.

나는 서서히 마치 술에 취한 듯 푸석거리며 무겁게 지나간다.
국군 창동병원의 철조망 쳐진 담벼락과 마주하는.
술집들에는 반짝이는 전구가 무수히 많이 있고.
눅눅한 밤에 어울리는 옷차림의 아줌마들, 아가씨들이 나와 앉아있거나.
한가하게 강아지와 장난을 치는 모습도 보인다.

거기에 '거북선'이란 불꺼진 먼지 쌓인 죽은 술집이 있고,
바로 옆에 '잠수함'이란 맥주, 양주 집이 있다.
그리고 그 코앞에 '촛불'이라는 끈적이는 불빛의
전구가 듬성듬성 살아있는 허름한 술집이 있고
입구에 검은 긴 생 머리에 자주색 스커트의 한 젊은 아가씨가
동그랗고 작은 딱딱한 의자머리에 앉아 손 전화로 문자를 보내는지,
인공위성을 통해 어린 왕자와 교신을 하는지,
한참을 바라보면서 만지작거린다.
그러다가 발걸음에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나는 촛불여자와 눈이 한번 마주친다.
쨍! 잠시 슬픔이 스치운다.

난 잠시 커다란 콘크리트 기둥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촛불'은 불꺼진 거북선 바로 옆, 잠수함 코앞에 있다.
그리고 호피, 비어 전문이라는
촛불술집의 검은 긴 생머리의 아가씨는
거북선 바로 옆 잠수함, 또 그 옆의 촛불에 그렇게 앉아
커다란 기둥에 기대 있다가 떠나는 비틀거리는
잡초같은 인연(因緣)을 배웅한다.

난 다시 또 걷는다.
어둠은 조금씩 탈색되어 내 몸을 검게 만든다..
좀 더 도봉대로을 따라 걸어서 나는 나의 개인 병실로 도착하였다.
공습(空襲)을 피하여 숨는 개인호(個人壕)에 도착하였다.
서너 개의 낙오된 설익은 빗방울이 마른 내 입술을
때렸지만 기다리던 여름 밤비는 오지 않았다.

촛불은 불꺼진 거북선 바로 옆, 잠수함 코앞에 있다.
촛불아가씨는 오늘밤 다리를 쩔룩이는 개구리를 태우지 않고
혼자 잠수함을 타고 이 밤에
자주빛 넘실대는 저어 푸른 남해, 그 통영바다로 갔을까?.

출처 : ㅡ세상걷기ㅡ
글쓴이 : 참외배꼽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