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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손홍식

물에 불린 바나나 2010. 4. 23. 11:01

수필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

                                 손홍식




가장 빠른 것의 대명사를 빛의 속도라고 말한다. 1초에 30만km라니 가히 엄청난 빠른 속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들 머릿속에는 순간순간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른, 얼마나 많은 큐피드의 화살 같은 생각들이 스쳐 가는가. 이를 곰곰 생각해보고 다시 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아직 여력(餘力)이 부족하다. 이는 그만큼 현대인이 무엇인가에 쫒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해지고 살기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정서적 안정감을 잃어버린 지 꽤 오래인 것만 같다.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홀리거나 블랙홀에 빠진 듯 허우적대다가 어디선가 귓전을 때리는 구급차 소리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구급차의 다급한 ‘삐옹, 삐옹’ 소리는 위급한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그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그 순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저 촌각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머릿속에는 응급환자 하면 출혈이 떠오르고, 이런 상황에서 되도록 빨리 수혈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인간만이 수혈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는데 마침 눈앞에 헌혈차가 보였다. 만 16세부터 할 수 있는 헌혈을 18년간이나 늦은 내 나이 34살에 행동으로 옮긴 첫 헌혈이었다.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평소 생각은 ‘내 자신이 아파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뇌까렸던 내 자신이 첫 헌혈을 하였으니, 그 변화는 나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움 그 자체였다.

1984년 5월 29일 첫 헌혈을 끝내고서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앞으로 절대 작심삼일(作心三日)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계속 헌혈을 하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작심삼일로 그치고야 말았다. 그러다가 길가에 주차해 있는 헌혈차를 보거나 텔레비전에서 혈액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나오면, ‘이게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헌혈을 열 번 정도 하였을 때, 몸에 아무 이상이 없자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하여 ‘헌혈은 주기적으로 하는 것이 낫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꾸준히 실천하여 왔다.

헌혈을 자주 하니까 새로운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헌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목욕이나 이발 또는 미용과 같으며, 창문을 열어 방안 공기를 바꾸어 주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기(氣) 순환작용의 일환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깨달은 것이다. 이는 바로 조혈기능의 활성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되었다.

이론이 아닌 실제 생활을 통해서 내 자신이 헌혈의 선봉이 되어갔다. 솔직히 헌혈 초기는 헌혈을 하고 나면 제공하는 초코파이와 음료수, 더 나아가 답례품에 먼저 마음이 갔다. 그러나 헌혈 횟수가 늘어나면서 혈액은 다른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는, TV 등 공산품처럼 공장에서 생산해낼 수 도 없고, 벼나 무처럼 논밭에서 재배할 수 도 없다는 사실에 헌혈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였다. 이래서 ‘헌혈이 필요하다.’ 라는 아름다운 생각에 중독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생명의 윤활유라는 일념으로 꾸준히 헌혈활동을 하였으며, 한 차원 높은 생각으로 나 자신 자긍심을 갖고 살아가게 되니 나날이 활기차고 즐거워졌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헌혈에 중독 되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약이나 흡연, 알코올 중독은 당연히 해롭지만 헌혈중독은 백만 번 천만 번이라도 좋다고 생각한다. 주위에서 그런 말을 자꾸 들을 때마다 오히려 내 의욕은 더 커져만 갔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 헌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불식시켜야한다는 어떤 책임감 같을 느낀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다 헌혈인으로 알려져 표창을 받을 때마다 기분은 한껏 고양(高揚)되었으며,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동기부여를 하라는 격려와 사명감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더욱더 헌혈을 열심히 하며 주위 사람들의 동참을 유도하리라 굳게 다짐하였다.  그래서 TV나  라디오에 출연했고,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기도 하였고, 친목모임이나 학교, 공공기관 등에 가서 강의를 하기도 한다.

한편 1990년대 초반에 불기 시작한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본부의 생명나눔운동에 동참하여 만성신부전증환자에게 하나의 콩팥을 기증하였다. 이의 과정에 이르기까지는 헌혈을 통한 수혈도 하나의 조직 즉 세포이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공감한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간암 환자에게 간의 절반을 기증하기도 했다. 간장의 기증 또한 조직 즉 세포이식이라는 헌혈의 또 다른 연장선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백혈병환자를 위해서 혈소판 헌혈도 60여 번이나 했고, 골수기증을 위해 접수도 했지만 1/20,000이라고 하는 조직적합성(HLA)검사에서 일치하는 환자가 없어 골수기증을 할 수 있는 상한연령인 55세를 아쉽게도 넘겨 버렸다.

몸으로 마음으로 해온 헌혈과 장기 기증을 통해서 내 자신의 건강에 대한 내면세계를 보다 이해하고 관리하는 기회가 되었다. 헌혈은 바로 건강검진의 기회요. 건강검진은 이의 확인, 확인은 확신, 확신은 건강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헌혈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건강한 사람들의 권리임에 틀림없다. 의무와 책임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은 더 이상 아니다. 건강한 사람의 당연한 권리는 소극적인 권리가 아니라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해서 얻어지는 행복바이러스를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권리이다

24년여의 헌혈을 해오는 동안의 세월은 내 건강을 다지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앞으로의 건강을 가늠하는 잣대와 이정표가 되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소중한 경험의 기회를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나태와 방관을 경계하면서 헌혈정년인 64세까지 앞으로도 꾸준히 헌혈을 지속할 예정이다.


*신인상 심사평(김학)


손홍식의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을 신인상 당선작으로 추천한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화자의 헌신봉사 정신이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다. 기네스 북에 오를 정도로 헌혈을 생활화 하고 있는 게 화자 자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간암환자에게 자신의 간을 절반이나 기증한 화자야 말로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살아있는 천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밖에도 백혈병 환자들에게 혈소판 헌혈도 60여 회나 했고,  골수기증을 하려고 접수했지만 아직 대상자를 찾지 못한 채 골수기증 제한 나이인 55세를 넘겼다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느 한 가지라도 선뜻 따라하기 어려운 일들을 그는 대수롭지 않게 실천한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야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화자는 아무도 흉내 내기 어려운 자기의 체험에 깨달음을 섞어서 진솔하게 한 편의 감동적인 수필을 빚었다. 이제부터는 좋은 수필을 빚어서 육체적으로 헌신봉사 했듯이 정신적으로 헌신봉사 하기 바란다. 가능성이 예견되는 수필가 한 사람을 발굴하여 문단에 내놓게 되어 기쁘다. 정진을 바란다.

출처 : 김학-두루미 사랑방
글쓴이 : 두루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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