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걷기

수원 화성 성곽걷기(09.1.21.wed) -담백한 둥글레차 맛처럼 밤길을 걷다

물에 불린 바나나 2009. 1. 23. 12:01

늘 걷기에 대한 약속을 하면 시간때문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지난 수요일 밤, 전날  수원에 나간다고 약속을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 혼자 일찍 올라오는 바람에 모처럼 여유가 있겠다 싶어 가벼운 흥분마져 생겼다.

그래? 혹시 그러면... 더 먼 일산걷기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고민하다가

나리모님에게 반가운 전화를 드려봤더니 목요일이라고한다...

이런... 그러게 재착 확인을 하지...^^; 그래서 약속대로 수원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늘 어김없이 복병이 생겼다. 분당-내곡도로의 끝까지는 좋은데 도곡동쪽이 문제였다.

늦어도 밥은 먹고 가는게 걷기에 좋겠다 싶어 서둘러 밥을 먹고 뛰었다. 헉헉대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6시 50분 모임시작 10분전이었다.. 전화는 이미 해둔 상태..." 먼저 걸어요..."

수원역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아직 수원쪽 지리는 몰라서 가다가 여러번 전화를 했다.

 

피곤해서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졸고 있는데 띠리리... 아리따운 여자분의 목소리.

아름다운 빈그릇님과 함께 나오신 유빈님이셨다.

버스는 그렇게 한시간 여를 달렸다. 죽전,수지를 통과하며 용인과 수원의 골목골목 헤집고 다녔다.

이미 늦은거 마음졸지 말고 편하니 쉬면서 가자 했지만 자다가 받은 전화를 끊고 나서

는 낯선 도시의 거리 풍경과 사람들에게서 나는 흔들리는 시선을 보냈다.

목적한 여행지에 도착하기전 이미 나는 겨울밤 도시의 여행자가 되어 관찰을 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뒤 내가 내린곳은 남문, 영동시장, 2001 아울렛이란곳...

나중에 알고 보니 남문은 팔달문을 의미하는 것이었단다. 그리고 그 시장은

화성의 냇물이 흐르는 복개천주변에 자리잡은 곳이었다.

그리고 두 분이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나오기로 했다.

 

두분과 녹산서점 앞 빌딩에서

만나기 전까지 난 예나 지금이나 낯선 곳에 가면 처음하는 '정찰활동 걷기'를 시작했다.

포목과 한복 전문 재래 시장인 영동시장도 둘러보고 근처의 중국식품 가게 늘어선 곳도 구경했다.

재래시장은 설 명절 대목을 앞두고도 인적이 한산했다. 8시 뉴스에서는

용산 참사사건의 수사내용과 시민들의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안과 밖으로 참 어려운 시기다.

 

2층 서점역시 한산했다 . 늘 그랬듯이 입구쪽 여행서적 코너에 가보았다.

정말 서점에는 걷기 코스를 소개하는 서적이 많이 나와있었다. 가히 정보의 홍수!

산티아고에 이어 제주 올레길도 이제 서시히 이름이 나오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 자전거를 타고 걷기 좋게 만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터다.

 

지역에 가면 지역 특유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다.

내가 기다리며 주위를 돌아보다 돌아온 그 자리에서 여러명의 아가씨들이 누군가 기다리는가 싶더니

삼성 반도체 표찰을 단 관광버스가 다가와 그들을 태우고 떠나는 것이었다.

남친을 기다리는가 했고, 여자친구와 수다를 떨던 그 분들은 야간 근무조였나보다.

며칠째 추웠던 날이 풀려 장갑도 없이 그냥 이틀째 출근했고 무릎이 나온 양복바지에

구두는 벗고 차에서 꺼낸 낡은 운동화를 신고 겨울 조끼하나 겹쳐 입은 나는 그저 여친이 준 스누피

마스크 하나 낀 뚜벅이의 모습이었다. 

난....., 그냥 함게 걷자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고, 그냥 밤에 도시안의 성곽

화성을 걸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오랜만에 소탈하고 친근한 모습의 아름다운 빈그릇님과 그날 처음 본

단정한 등산복 차림의 목소리가 정말 예쁘고 젊어 뵈는 유빈님과 반가운 악수를 나누었다.

이런 겨울밤에 우리는 차가운 손을 마주 잡으며 묘한 동지애를 느꼈다.

두 아들과 2년전 문경세재 여행걷기에서 처음뵈었던 그 분이셨다.

한겨울의 수원의 1월 21일밤, 밤 8시 반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40여년전 그날은

서울 북악산 성곽을 타고 북한의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넘어온 그날이었네...

 

내 제안(부탁!)으로 수원화성으로 올라갔다. 적당한 크기의 아담하고 예쁜 팔달문을

지나 돌계단이 좀 급하게 있는 쪽으로 올라갔다.

검은 깃대와 빨간 깃발이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있고 성곽 바닥에도 노란 알전구가

환하게 켜져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정성껏 등산 아니 등산이 시작되었다.

 

서서히 우리 발아래 들어나는 수원의 야경. 저 멀리 까마득히 먼 산아래 부터

바로 아래까지 휘황찬란한 겨울 도시의 불빛들.... 꼬리를 무는 차량의 불빛들!

가끔 너무 작고 가벼워보이는 비행기 몇대가 느릿느릿 깜빡이 등을 키고 하늘 위를 활공했다.

"그래 이것을 제가 보고 싶었어요!"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작은 고요함, 분명 거대한 도시속의 성곽은 소음을 흡수하는 방음벽이었고

현대와 과거를 연결하는 타임머신의 교차점 같았다. 성곽이 주는 미묘한 긴장감과 안온함. 

 

수원화성은 내가 2003년 1월 이 뚜벅이의 길(내가 개명한 -세상걷기-의 전신)

모임에  가입하고 첫번째 강화도 걷기에 이어 두번째 정모로 나와 걸은 곳이었다.

그때는 봄비가 촉촉하게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때는 화성 행궁을 돌았는데 그때도 참 신기한게 도시속의 이런 성곽이 존재한다는

자체에 무척 흥미를 가지고 놀라와했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내가 카페지기를 할때  봄 정모였나 그때 팔달문에 거의 다와서

내 남동생 와이프, 제수씨가 첫째 아이를 건강하게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팔달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아참 그러고보니 그 이후로도 가을인가 다시 한번 수원화성을 걸었던적이 있는거 같다,

여하튼 밤에 와보고 싶었다. 낮이 아닌 밤에는 어둠속에 쌓인 성곽의 모습과 흙을 밟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밤에 보는 수원화성의 모습 역시 아름답고 고즈넉한게 참 마음에 든다.

힘들게 찾아온 보람이 느껴진다. 우리 세 사람은 멀어지고 또 가까와지는 성곽길을

따라 졸졸졸 발걸음을 떼었다. 아름그릇님이 친절히 설명을 해주셔서 고마웠다.

때로는 감탄사가 나오고 때로는 말없이 조용히 걸었다.

 

겨울에 걷기가 주는 매력은 무성한 녹색이 지천인 산이나 들을 걸을때와는  다른다.

잿빛 도시속에 생명력있게 남아있는 -물론 훼손이 되서 시멘트가 섞여있지만- 이런

성곽을 걸을때는 복합적인 재미를 느낀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나의 망막의 스크린에는 한편 성곽을 바라볼때 도시의 저 답답한 성냥곽들은

없어진채 온전히 군불이 초가 주막에서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옷부터 추위를 대비한 옷차람이고 역시 조금 몸이 움추림것으로 생각이 되나 조금 걷다보면

추위는 우리 몸과 같이 하는 동반자가 된다.  

 

 

 

 

 

 

정말이지 추운 바람이 없었다. 오히려 커다란 소나무 군락들과 성벽이 겨울 바람을

막는 병풍이 된 느낌이었다. 역시 걷기를 마치고 다시 시끄러운 소음을 선두로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리는 도시로 다시 빠져나왔을때는 한겨울 찬 바람이 쌩하고 귓볼을 때렸다.

 

인적이 드물었다.

재잘대며 성문을 빠져 나와 같이 걷던 젓살이 통통한 여중생 세명이

검은 스타킹 타이즈 바람으로 걷다가 한명은 성안의 집으로 나머지 배웅하던 두 아이는

다시 성곽으로 빠져나갔다. 성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성안에서 잠을 자고 싶었다. 성안은 정말이지 조용하고 한산했다.

 

성곽안의 어둠침침하고 허름한 집들사이에 있는

빨간 불빛의 궁전 모텔.누군가 사랑을 나누는지 구석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한참을 걷다가 수원화성의 제일 높은 저곳을 장대를 바라보니 우리가 그렇게 멀리왔는가 싶었다.

겨울에 그리고 사람이 많지 않으니 발걸음이 빨라질수 밖에 없는거 같았다.

 

 

 

 

 

 

 

 

 

 

국궁장이 있는 얕은 구릉지 성곽문은 가로등도 어두웠다. 병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이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하였고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무얼까,

자동차 몇 대가 스르르 다가왔다 성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걷는 커플도 몇몇 있었다. 가벼운 산책과 걷기가 주는 친밀감...

간혹 마주친 성곽을 걷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혹은 앞서가며

한마디 인사도 없었지만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이 은밀하고 담백한 걷기가 주는

충일한 겨울밤의 행복한 여행에 충분히 행복해했으리라.

 

이 한밤중에 우리는 우리의 무던하고 성실한 발걸음에 그냥 만족해하고 대견해했다.

성문의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즐거운 걷기가 끝나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

우리 세사람, 우리는 버스에 타고 헤어지면 버스창가에 서자마자 손을 흔들고

버스가 사라질때까지 한참을 바라봐주었다.

각박한 일상에서 탈출하여 참여한 걷기에서 나는 소박한 한밤의 걷기 여행의 감동과

재미를 느낀 행복감으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집으로 오는 길은 버스에서 내려 뚜벅뚜벅 걸으면서...

하늘의 밤별들이 유안히 총총총 예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