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여행

호시탐탐 호주를 탐하라! 호주 원정대 이벤트- 인터파크 여행 "나는 왜 호주에 가야하는가"

물에 불린 바나나 2012. 5. 16. 11:46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가 2005년 1월 부터 10월까지 생활하며 겪은 이야기를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7년전만해도 저는 영화에 꿈을 안고 살아가던 30대 청년이었습니다. 지금 직장생활은 하고 있지만... 독립영화를 만들고 앞으로 좋은 영화작가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변두리의 옥탑방에 살다가 그것도 까먹고 도봉산 지하방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지방에서 연극을 하면서 노점에서 붕어빵 떡볶이 장사를 2년해서 어렵게 모은돈으로 영등포 신길동에 옥탑방을 하나 월세로 얻는거죠. 당시에는 뭐 수입이래봤자 이삿짐일을 하거나 건설 막일을 해가며 살았지요. 후배들 영화만드는 일을 도우면서요, 물론 품앗이 작업이라 돈을 버는 일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영화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기에 삶의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변치 않은 수입으로 생활의 고통이 다가오고 서서히 힘들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여름 어느날 종로에서 막 영화작업을 마친 동생들하고 술을 기분좋게 한 잔하고 좀 취해서 가다가 그만 삐끼의 유혹에 걸렸습니다. 호기심에 그 삐끼의 차를 타고 술을 더 마시러 간게 강남의 어느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만 바가지를 쓰고 말았습니다. 2명이 먹은 술값이 나중에 계산할때 보니 250만원! 억울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거길 도망나오지 못한게 두고 두고 아쉬웠습니다. 대리운전도 하고 이사짐일도 하면서 영화작가 지망생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했는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카드 연체 전화는 계속 오고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가을,오랜만에 연락이 된 고향의 동생을 만났는데 그 동생이 호주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외국엔 한 번도 나가지 못했던 내가 궁금해하자 그가 말했습니다. " 형, 내가 미용 기술을 배웠잖아,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생각해서 1년전에 가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왔어, 형도 가서 농장에서 일을 하면 돈을 벌수 있을거야, 나중에 영화를 만들만큼..." "그래? 거기서 무슨 일을 하니?" "내가 아는 농장이 있는데 포도나 오렌지를 따는 일이야 손에만 익으면 괜찮아! "그럼 또 돈이 필요할텐데.." 비행기 값과 처음 얼마간의 필요했습니다. 카드값은 계속 불어났구요.이젠 생존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호주 갈 돈을 모으기 위해 서울역 옆의 인력센터를 통해서 지방의 아파트 공사현장을 2달정도 돌며 아파트 방과 거실의 보일러 배관이 끝난곳을 평평하게 시멘트로 채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수원, 평택 대전의 현장을 돌고 여관에서 자며 그렇게 모든 돈이 150만원 정도 그걸로 왕복 비행기 표를 사고 드디어 2005년 1월 호주로 떠났습니다.

 

우선은 호주에 먼저 가있던 고향 동생이 있는 카라반(캠핑카)에 묵으며 일을 찾았습니다. 동생은 미용사인 여자친구와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제가 돈을 벌어 독립하기전까지 같이 있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1주일을 빈둥대다가 처음 간 뉴사우스웨일즈의 밀두라라는 작은 시골. 거기포도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죠. 그러나 포도를 따는 피킹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포도도 좋지 않았구요. 그래서 번 돈은 방값과 식비로 들어가고 이렇게 해서 어떻게 돈을 모으나 싶었어요. 거기다가 외로움까지.. 연상의 여자친구를 두고 왔거든요. 두려움과 후회... 그리고 이국땅에서의 고독감!

 

 

---- 통가에서 일하러 온 마음씨 좋은 아저씨와 함께 ---- 

 

참자,또 참자 인내하자 스스로에게 맹세를 하고 천천히 배워나갔습니다. 서울에 올라올 때도 붕어빵, 떡복이 노점을 돈을 모아서 올라왔거든요. 어떤 상황에서도 난 이겨낼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다시 이를 악물고 일했습니다. 한달이 지나자 이제 일이 좀 익숙해졌습니다. 나이가 있어서 워킹 홀리데이 비자가 없어서 걱정했지만 관광비자 3개월이 끝나면 다시 6개월 연장을 받기로 미리 계획을 세우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이미그레이션(이민국)에 가서 인터뷰를 하는게 쉽지 않았습니다. 통장에 현금 잔고가 있어야  이사람이 관광을 하는구나 알수 있기에 동생 돈을 빌려서 잔금 증명을 했고 여행계획서도 제출을 했습니다. 이 비자 연장도 삼수를 해서 겨우 받았습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와서 한국사람들과 어울리며 일하는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저는 35세였고 너무 가난했기에 거기 생활을 즐길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일요일에 피자 한판을 사서 강가에 가 혼자 우걱우걱 먹는데 눈물이 핑돌더라구요...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모습

 

--- 중간 중간 빈박스가 있는데 거기에 비닐을 씌우고 가위로 포도를 따서 보기좋게 다름어 10k를 만들어 내려놓으면 나중에 트렉터가 와서 수거해갑니다.. 한 박스당 2달러가 채 안되는 돈을 받죠.. ----

 

 

그러나 고생은 이제 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먼저 온 고향 동생 커플이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이제 모든것을 혼자 해결해야 됐습니다. 돈을 정말 아껴서 썼습니다. 김치도 엉성하게 담그고 또 일을 위해서 중고차를 한대 샀습니다.  아시겠지만 워낙 넓은 땅 덩어리라 한 곳의 일이 끝나면 다른 농장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경찰차가 따라와 차와 집을 수색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관광비자로 온 사람이 일을 하면 불법이라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외국에서 온 불법노동자의 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저도 힘없는 가난한 돈을 벌기위해 온 노동자였기 때문이었죠.힘들게 일을 하면서도 통장에 돈이 한 푼 두푼 모이는 재미로 버티었습니다.일기를 쓰고 제 여자친구에게 매일 매일 대화하듯 편지를 쓰면서 외로움을 견디었습니다.

 

포도 시즌이 끝났는지 농장을 몇군데 옮겼는데 포도 농장 일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다시 조금해지기 싣작했습니다. 그래서 더 멀리 나가서 일을찾은 것이 오렌지 농장! 저는 오렌지 나무에 가시가 있는 줄은 그때 알았습니다. 포도야 리어카에 빈박스를 싣고 이동하며 포도를 가위로 따서 솎아내고 저울에 달아 그 자리에 내려 놓으면 트렉터가 싫어가는 일이었는데 이 오렌지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습니다. 커다란 오렌지 나무는 무겁고 기다란 사다리를 통해서 올라가서 내려오면서 손으로 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오렌지는 차고 있는 앞치마 같은 것에 모아두었다가 빈이라고 말하는 커다란 박스에 채워놓는 일이었습니다. 농장은 또 어찌나 크던지... 트렉터가 군데 군데 다 채워진 오렌지 박스를 옮기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빈(박스)를 채우면 받는 돈이 세금 제하고 18~19달러 정도... 우리돈으로 1만5천원 정도였나? 하여간 무수히 많은 가시가 손에 들어가고 손목이며 어깨며 여간 중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돈을 벌어야 한국으로 들어가서 밀린 카드값도 갚고 생활비도 벌어야했습니다.

 

오렌지농장의 수확한 빈 앞에서 일을 마치고

제가 산 차위에 올라앉아 일마치고 목을 축이는 모습---

저 커다란 박스를 빈이라고 합니다.. 캥거루 주머니같은 자루에 가득 채운뒤 다시 빈에 채워 넣습니다.--------- 

 

 

일도 이제 이골이 나서 어떤때는 농장일을 하던 프로보다도 더 많이 수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숙소(카라반 파크- 캠핑카와 곤도라가 있는 여인숙 같은 곳)도 여러곳을 옮겨다녔는데 2달 넘게 호주 밖의 섬나라인 통가에서 온 리키라는 덩치큰 친구와 같이 생활도 하면서 그곳의 문화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워낙 술을 좋아해서 술을 먹고 술을 안먹는 저와 다투는 일도 있곤 했죠. 그래도 이 리키의 친구 친구들 집에 찾아가서 손님으로 대접도 받고 거기의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답니다.

나름대로 호주의 친구도 사귄다고 필리핀 여자와 결혼해 아들을 하나를 낳고 사는 호주 친구집에도 자주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영어를 조금 할수 있어서 대화가 되었습니다. 뭐 그리 겁먹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제 돌아가는  항공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정말 나에게 휴가를 주기로 하고 애들레이드에가서 관이라는 기차를 10시간 정도 타고 호주 중부의 알리스 프링스로 가는 기차를 타고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갔다왔습니다. 통장에는 우리돈 1천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 모아졌습니다. 어찌나 스스로가 대견한지 정말 저에게는 큰 돈이었습니다. 통장을 깨고 난 돈을 꼬옥 붙잡고 잠이 들었지요. 

 

다음날 이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는 순간 어찌된지 공항에서 검문에 걸렸습니다. 이게 왠일이지 혹시 돈을 압수 당하는게 아닌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두렵구요.. 호주 경찰이 오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여권의 비자 만료가 몇일 지난거 였습니다. 정말 바보 같은 실수 였습니다. 방법은 한국 대사관이 있는 캔버라로 가서 여행증명서를 받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 너무 큰 실수를 저질러서 제 스스로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다시 엎질러진 물을 담을수 없는 일. 수도 캔버라로 그날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거기서 몇 일 머물며 시내를 걸어다니며 여행을 했습니다. 마음을 진정하고요. 그렇게 해서 10월 하순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가슴이 정말 짠하더라구요. 몸은 홀쭉해지고 검게 탔구요... 

 

 캔버라에서 귀국을 기다리며 처량하게 비를 바라봄

--- 캔버라에서 저녁 산책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

 

한국에 와서 먼저 밀린 카드값을 값고 고향집에 내려가서 부모님께 100만원을 드렸습니다. 그동안 드리지 못한 용돈을 드린거죠. 남동생 부부가 낳은 첫째 조카 얼굴도 그때서야 봤습니다. 이렇게 10개월 정도의 저의 호주 생활이 마감이 되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외로웠던 가슴아팠던 35세 남자의 호주 생활! 그렇지만 그때 쓴 일기장과 주급표, 그리고 사진들이 저에겐 아주 커다란 추억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때 흘렸던 땀방울의 가치를 알기에 지금 제 위치에서 지금 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힘들때마다 그때를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도전했고 참고 인내했기에 지금의 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이렇게 그때를 돌이켜보니 참 가슴이 짠해지네요.. 스스로에게 고맙고 대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나 타지에서 힘들게 고생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두서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당시에 썼던 일기장 입니다.. 2005.4.28 ------

 

 

 

 

http://tour.interpark.com/event/event_view.aspx?seq=3967®ion=006&mbn=tour&mln=main_flash_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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