井中之蛙(정중지와)
생각이나 식견이 좁은 사람이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을 우물 안에 개구리
즉 정중지와(井中之蛙)라 한다.
莊子(장자)의 추수편<秋水篇>에 보면 문답형식으로 도(道) 설명하면서
황하(黃河)강의 신(神) 하백과 대해(大海)의 신(神) 약(若)이 등장한다.
도(道)는 장단고저(長短高底) 혹은 대소귀천(大小貴賤)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구별 없이 도(道)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설파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형 문장이 이어진다.
중국에 대륙을 가로 지르는 황하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다.
황하에는 강을 지키는 ‘하백’이라는 신이 살고 있었고
‘이 세상에 이렇게 넓고 큰 강은 없을 것이다.’ 하백은 황하를 지키는 자신을
뿌듯하게, 자랑스럽게 생각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작스런 의문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이 큰 강이 흐르다 멈추는 곳은 어디일까?”
하백은 황하를 따라서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고 흐르는 물길을 따라 가던 끝에
이윽고 바다에 이르렀다.
‘세상에! 이렇게 넓은 곳이 있다니.’ 바다를 본 하백은 깜짝 놀랐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바다를 지키는 신이라고 하는 ‘약’이 하백에게 묻는다.
“뉘 신지요? 나는 이 바다를 지키는 ‘약’이라고 합니다만.”
“네, 저는 황하를 지키는 하백이라고 합니다. 와! 바다라는 것이 참으로 넓군요.“
“아니,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황하가 가장 넓은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다를 보니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약”은 이렇게 말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한테는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지요.
그건 그들이 좁은 곳에서만 살기 때문입니다.
또 여름한철 살아가는 풀벌레한테는 눈(雪) 얘기를 들려줄 순 없겠지요?
그들은 오직 여름철 밖에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네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약은 이어서 말한다.
“마찬가지로 학문과 식견이 부족한 이와는 진리를 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편견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 이지요.
하지만 하백 당신은 큰 바다를 보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으니,
나와 진리를 이야기할 만합니다.“
장자는 좁은 세상 속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되지 않으려면 두루 견문을 넓히고
깊은 생각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전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나 바로 열려있는 마음이듯 하다.
요사이 많이 쓰는 말 중 글로벌(Global)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세계가 더욱 가까워졌고, 점점 장벽들이 무너지고 있다.
이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지금은 세상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기업 중국진출로 인하여 한국교민이 칭다오에 십만 여명이 모여살고 있는
현실이 결코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정말 글로벌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부 교민 자녀들을 중국 로컬학교를 보내면서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있지만
그것이 특별한 일로 받아드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이전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인가?
만약 중국 칭다오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 애착을 가지며
평생 살 것처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라고 말한
어떤 분의 지적이 필자의 뇌리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있어
고민을 털어놓아 본다.
태어난 환경을 원망하거나 부모 잘못 만난 것을 탓한다면
그것은 못난 사람들이 하는 짓이라 생각해 본다.
세상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절대 선택할 수 없는 것이 부모일 듯싶고,
그 부모가 어디에 있으면 시작은 방법 없이
그 환경 그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있으니 애착이 가는 것이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듯싶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 노래 말처럼 정들어 버린 칭다오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개구리가 그 우물 외에는 모른다는 것과는 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정중지와(井中之蛙)를 이렇게도 설명하고 싶다.
개구리가 주어진 우물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면서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그 우물 밖에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개구리에게 돌멩이를 던질 필요까지 있겠는가 생각해본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 보다 못한 사람들과는 합치려 하지 않고
어울리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교하여 좀 부족한 사람들을 우물 안 개구리라고 흉본다.
자기가 바로 우물 안 개구리인 줄 모르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우물 외에는 가지 않으려 하고 그 우물에 자기보다 못한
개구리는 절대 수용하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장자가 말한 것처럼 도(道)라는 것은 분별은 해야겠으나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장단고저(長短高底), 대소귀천(大小貴賤)을 따져서 유유상종(類類相從)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소인배들이나 하는 행위일 듯하며
그것이 우물 안 개구리 정중지와(井中之蛙)이다.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과 좀 다르다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산다고
지적한다면 곧 본인도 자기가 만든 우물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은 틀린 것이 아니라 나하고 다르다고 인정하면 안 될까?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머지 손가락은 누구를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면 안 될까?
오해하지 말고 삼해만 빼어내어 이해하면 안 될까?
- 원호님이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