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떼끄컬트

[취재 현장]대전 문화에 4·19를 (1998.04.18)

물에 불린 바나나 2022. 6. 15. 09:10

대전의 극장가는 여전히 겨울이다. 썰렁하다 못해 춥다.「타이타닉」을 상영하는 몇몇 극장을 제외하고는「관객의 씨가 말라 버렸다」는게 극장관계자들의 푸념이다. 관객 한사람을 앉혀놓고 필름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다. 극장관계자들은 대전관객들의 취향은 도통 가늠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는 영화도, 서울에선 제법 먹혔다는 영화도, 대전만 오면 죽을 쑨다. 이름만으로 관객을 쓸어모은다는 스타를 등장시키고 액션으로 범벅을 해, 이래도 안 볼거냐고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어도 심심하긴 매일반이다. 요컨데 애면글면 바둥거려 보았자 말짱 노랗다는 것이다. 대전관객들을「수준이하」라고 절반을 잘라 깎아내리는 관계자도 있다.

어제 막을 내린 영화「킹덤」은 그런 극장관계자들을 머쓱하게 만들어 놓았다. 부천 환타스틱영화제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이 영화는 서울 상영때 매회 매진, 특히 심야 상영엔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이들이 더 많았을 정도로 관객을 끌어 모아「귀신붙은 영화」라 불렸다. 서울과 부산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소식에도 대전 극장관계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하루 3회 돌리기에 빠듯(상영시간 4시간 39분)하고, 대전관객들을 믿지 못하는 터에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의 영화사도 마찬가지였다. 경부선을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던「킹덤」은 올라가는 길에 대구엔 들렀지만, 대전은 거들떠 보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킹덤」을 대전으로 불러 내린 것은 영화팬들이었다. 대전지역 영화동호인 모임인 시네마떼끄 컬트의 대표 황규석씨(30)는 영화사에『대전 시민들도「킹덤」을 보고 싶다』고 당당히 요구했다. 그는『대전시민들도 좋은 영화를 볼 자격이 있다. 기회마저 빼앗긴다면 무시 당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 3일 아카데미 극장에 걸린「킹덤」은 금·토요일이 낀 3일 동안, 심야상영엔 매진을 기록하며 1천여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침묵했던 대전 영화팬들은 모처럼「좋은 영화」에 대한 갈증을 풀어냈다.

문화도 제대로 누리려면 소리를 내야한다. 문화행위도 엄연한 소비행위이며 문화행위의 속성이자생적·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킹덤」의 대전유치는 대전시민들이 문화소비자로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 단초로 읽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입다물기」에 익숙해지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처세에 길들여져 왔다. 그것은 문화행위에서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대전은 조용한(:)동네로 손꼽히고 있다. 어깨춤이 절로 덩실거리는 풍물에도「얼쑤」소리 한마디 나오지 않는 곳이 대전이었고, 주최측의 부당함과 횡포도 다 눈감아주고 넘어갔다. 그렇다보니 이른바 문화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대전을 재미없는 도시, 한술 더 떠 문화의 불모지라고 감히 말한다. 대전문화가 살아나려면 외침이 필요하다.「킹덤」의 대전상영을 당당히 요구한 젊음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대전문화에 4·19를 일으켜 주길. 서울대 4·19 선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문화의 침묵에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해주길 부탁한다. 1998.04,18

안순택 <교열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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