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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 > 쉬리, 블럭버스터?! 쉿! -정용진-

물에 불린 바나나 2009. 3. 4. 17:02

< 영화리뷰 >
쉬리, 블록버스터?!

쉿!
한 마디로 엄숙한 가운데 간간이 들려오는 핸드폰 소리, 웃음소리, 탄식 소리가 뒤엉킨 극장 안.
본 적은커녕 들은 적도 없는 물고기 '쉬리'를 쫓아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는 소리에 익숙해 질 즈음 하나의
강한 의구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과연 감독의 말대로 영화 <쉬리>는 조국 분단의 현실에 맞닿아 있는가!
그렇거나 말거나 요즘의 한국영화 인기를 반영하듯 평일 낮 시간인데도 대만원인 극장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마냥 파닥거리는 쉬리의 날이었다.


 문제는 크기다, 라는 화두는 이제 블록버스터의 대전제가 되었으며 한국영화의 평균제작비 15억 원에 비하
면 28억 원이 투입된 쉬리는 분명 한국형 블록버스터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목적은 분명해
지는데 여기에 영화 "쉬리"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철저히 자본주의 경제 원칙을 준수할 것. 관객을, 관객을
위한, 관객의 영화를 만들 것' 이것은 미덕인가? 함정인가?


 적이자 애인인 방희의 존재는 조국 분단의 현실을 빗댄 적절한 은유이자 이 땅의 간접 화법임에 틀림이 없
지만 결국 서로에게 총구를 맞댄 채 죽어 가는 사람과 피 묻은 사람으로 갈라서고 마는 까닭에 어쩔 수없이
닫힌 출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은 최대의 적이자 최고의 악
인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동정의 실마리는 끝끝내 실종되고 오로지 교과서적 해석에 머물고 마는 이  황당한
흑백논리 앞에서 과연 우리는 호탕한 웃음을 혹은 짜릿한 쾌감이나 쓸쓸한 안식을 가슴에 품고 나올  수 있
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쉬리"는 관객에게 봉사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블록버스터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시가지 총격전이나 대형 폭파 장면, 재미를  배가시킨 반전과 갈등하는 중
원의 심리묘사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강제규 감독의 의도
는 정확히 적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마디로 쉽고 간단한 이 영화는 그만큼  쉽고 간단히 잊혀지거나 폐기처분 되는 운명이기 십상이
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프로젝트 영화나 블록버스터 영화가 안고 있는 황금만능주의로 하여 표피적 관객
형성에 미칠 영향이라 하겠다. 오락적 역할로서의 영화는 그 이면에 배금주의를 깔고서 능수 능란하게 우리
를 요리할 것이며 즉각적 반응을 유도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생각의 마비, 비판의 묵살을 조장할 것이다.


98년 한 해 동안 흥행한 한국영화의 면면을 보더라도 이런  우려는 조금도 틀리지 않다. 97년 대비 3.6%나
늘어난 한국영화 관객 수는 몇몇 영화에만 몰림으로써 그 한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또 하나, 여기에 추가하
여 이 흥행 영화들의 대다수가 내세우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깡패이거나 육체적 힘에만 의존하는 인물로서
사랑과 우정을 쟁취하며 결국엔 죽더라도 오히려 그 죽음을 충분히 승화한 다음이어서 숭고미를 첨가할  따
름인데 이는 가히 '총의 사회학'이라 부를 만하다. 그리고 여기 쉬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총소리와 곳곳에
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의 모습들 여전히 다를 바 없다.


 문제는 크기다, 라는 화두는 굶주린 자들의 미학에 불과하다. '무엇에 그들은 굶주렸던가'의 문제와 '무엇이
우리를 굶주리게 했는가'의 문제는 결코 동일 선상의 문제가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미덕이란 크기나 양이 아니라 질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쉬리는, 맑은 물에서만 산다!


                                                                                                       글ㆍ정용진/CULT